“절대적 평화는 우리 세계에서 성취할 수 없는 목표입니다…. 하지만 이는 우리가 계속해서 여행해야 하는 목적지이며, 사막을 여행하다 마침내 구원을 받는 이들이 바라보는 길잡이 별과 같은 것입니다.”
21년을 기다린 연설이었다. 16일 오후(현지시각), 해마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의 연설이 진행되는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 시청으로 미얀마(버마)의 민주화 운동 지도자 아웅산 수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노르웨이 왕족과 현지 미얀마 민주화 활동가 등 행사장을 가득 메운 청중들이 일어나 따뜻한 박수로 그를 맞았다. 토르비에른 야글란 노벨평화상위원회 위원장이 “세계를 변화시킨 역대 평화상 수상자를 대표하는 존재”라고 수치를 소개했다.
수치는 이날 보라색 전통 의상과 옅은 보라색 스카프를 두른 채 교양 있는 영국식 억양을 써가며 지나간 시간들과 미얀마 민주화의 미래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연설에 담았다.
그는 21년 전 갇혀 있던 자신에게 노벨상 수상 소식이 줬던 의미에 대해 “억압받고 소외된 버마인들도 역시 세계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당시는 나 스스로 그런 사실을 실감하지 못했다”며 “노벨상은 내 마음에 새로운 문을 열었다”고 말했다. “연금시절, 내가 더 이상 현실 세계의 일부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지만 (평화상 수상은) 나에게 현실감각을 회복시켜 인류 사회로 이끌어냈고, 무엇보다 버마의 민주주의와 인권 투쟁에 대한 전세계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긴 시간이었다. 1945년 미얀마 건국의 아버지 아웅산 장군의 장녀로 태어난 수치는 군부 독재가 이어지고 있던 1988년 영국의 생활을 청산하고 모친의 간호를 위해 귀국했다. 그는 이후 야당인 국민민주연맹(NLD)의 총재로 취임한 뒤 1990년 총선에서 압승했지만, 군정은 선거 결과를 부정하고 그를 자택에 연금했다.
이후 세계의 여론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노벨평화상위원회는 1991년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비폭력 투쟁’에 대한 수치의 공로를 들어 그를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더 큰 억압이었다. 수치가 군부의 반대로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큰아들이 21년 전 같은 자리에서 수상 연설을 진행했다. 이후 수치는 영국에 있던 남편의 임종도 지키지 못한 채 2010년 11월 자택 연금이 풀릴 때까지 무려 15년에 걸친 가택 연금을 감내해야 했다. 노벨평화상위원회는 이날 수치를 불굴의 의지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을 끝내고 민주화의 문을 열어젖힌 인류의 또다른 거인 넬슨 만델라와 비교하며 그의 업적을 기렸다.
수치는 미얀마뿐 아니라 전세계의 양심수들이나 난민들과 어려움에 처한 이들에게 “잊혀진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이라며 독재정권으로부터 탄압받는 이들에게 강대국의 ‘동정 불감증’(compassion fatigue)은 “이중의 고통”이 될 것이라고 관심을 호소했다.
그는 미얀마의 현재 상황에 대해선 ‘조심스런 낙관주의’를 가져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미래에 대한 신념이 없어서가 아니라 눈먼 운명에 의지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리고 그가 두살 때 숨진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는지 “사람들이 나를 아버지의 딸로 봐 주는 게 기쁘다”며 “그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고 말했다.
수치는 18일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그룹 유투(U2)의 리더 보노가 그를 위해 여는 콘서트에 참석하며, 19일 영국에 있는 모교 옥스퍼드대를 방문한 뒤 영국 하원에서 연설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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